남선창고 - 설문 - 영선산 - 수문 - 해관 - 관수가 - 대각사 

이런 동선으로 가면서 초량왜관이 전관거류지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일본의 움직임과 조선 민중의 대응에 대한 내용을 담으려고 시도해봤습니다. 



남선창고 : 개항장의 조선상인들


1900년 경 정치국이란 객주가 초량객주들과 의논하여 함경도 해산물을 보관할 창고를 세웠는데 이게 바로 남선창고이다. 최초 남선창고는 북선창고로 불렸는데 나중에 객주들이 원산에 또 북선창고를 세우면서 혼돈을 피하기 위해 부산에 있던 창고를 남선창고라 부르게 되었다. 


개항 후 20년 동안 부산의 수출입액은 전체 수출입액의 50%차지했는데 여기에 일익을 담당한 게 바로 객주들이다. 객주업은 왜관이 없어지고 자유무역으로 바뀐 개항 초기에 시작되었는데 무역업과 여관업을 겸한 형태였다. 일본 상인들은 내륙의 사정에 어둡기 때문에 조선 내 판매는 객주들에게 의존했다. 1885년 일본인도 호조를 받으면 조선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내부 사정에 어둡고 조선인의 반일 감정 등으로 쌀 매수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1889년 동래부 기록에 의하면 영업세 납부대상인 객주는 44명이었는데 1년 뒤 1890년엔 부산항을 중심으로 각 포구에 객주는 대소 160명이 되었다. 객주들은 스스로 객주조합(1889년 부산객주상법회사)을 설립하기도 했고 조선 정부도 1895년 상무회의소 규례를 공포하여 객주들의 조직화를 뒷받침했다. 1909년 순종임금 순행 때는 동래상업회의소(1908년 명칭 변경)에 500원을 하사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부산의 조선인 객주가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일본은 1879년 도쿄와 오사카에 이어  세번째로 조선에 상법회의소를 설립했다. 이는 이는 부산을 거점으로 한 상권을 일본이 확보하고 일본의 정치 외교를 측면 지원하려는 의도였다. 1914년 조선 총독부 방침에 따라 동래상업회의소는 조선인 상업회의소로 바뀌고 1916년부터는 조선과 일본 공동의 상업회의소가 발족되었다. 



설문 : 초량왜관에서 전관거류지로


임란 후 폐쇄되었던 왜관이 왜인들의 끈질긴 요구에 1607년 다시 두모포에서 문을 열었고 두모포왜관이 좁다 하여 1678년 초량에 왜관을 신설했는데 현재 용두산을 중심으로 한 광복동 일대기 바로 그 지역이다. 설문은 초량왜관의 왜인과 조선인의 접촉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문이다. 


1876년 체결된 강화도조약 제 4관에는 "조선국 부산 초량향에 일본공관이 있어 오랫동안 양국 인민의 통상구역이 되어 왔는데 이제는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을 개혁하여 새로 만든 조관에 따라 무역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라고 나오는데 이에 따라 부산은 자동적으로 개항하게 되었다. 그해 8월 24일 조인한 조일수호조규부록 3관에는 개항장에 일본인 전관거류지 설치할 수 있게 했고 수문과 설문은 철폐하게 했다. 이듬해(1877년) 전관거류지 설정에 관한 실무회담이 개최되어 1월 30일 초량왜관터 11만평은 일본인 전관거류지(부산구조계조약이)가 된다. 조약에 따라 일본은 전관거류지에 대해 해마다 50엔을 납부했다.





영선산 : 부산 바다를 매축한 일본


부산은 동·북·서로 산 남으로 바다로 둘러싸여 시가지가 좁다. 넓고 평탄한 시가지 확장과 원할한 육로교통을 위해서 매축이 필요했다. 특히 전관거류지와 부산역 종점이 있는 초량역과의 연결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사이엔 130척(390m) 높이의 영선산과 영사관산 쌍산이 있었다. 지금의 부원아파트와 중부경찰서 쪽에서 솟구쳐 올랐던 두 산은 1909년에서 1912년 착평공사로 깍이게 된다. 그 공사로 부산역 종점이 지금의 세관이 있는 제1부두까지 연장되었다. 당시 새로 생긴 옛 부산역 부지를 새마당이라고 불렀다. 


부산항 첫 매축은 해관부지부터 시작했다. 해관구역이 좁아 바다를 메워야 했는데 처음엔 조선정부가 국토를 항부로 변형할 수 없다며 매립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에 이홍장이 중신과 고종을 설득해서 1888년 매축이 완공되었다. 


부산은 합병 전까지 두 번의 매축공사(1902년부터 1905년까지 1기, 1907년부터 1909년까지 2기)로 총 41,374평의 땅을 만들었다. 이 때 얻어진 땅이 중앙동 중앙로 일대, 옛 부산역과 오늘의 부산우체국과 세관부지다. 이때 매립에 쓸 흙을 구하기 위해 용두산과 복병산 사이를 깍았는데 그로 인해 오늘의 대청로가 만들어졌다.





수문 : 일본의 조선 침략 거점이 된 초량왜관


수문은 초량왜관의 출입문이자 한일 간 교류 장소였다. 수문 앞에선 매일 장이 섰고 조선사람과 일본인들이 만나서 물건을 사고 팔았다. 개항 후 수문이 철폐된 자리엔 1878년 제일국립은행이 들어섰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부산항이 개항한후 초량왜관은 조선과 일본 외교의 대결장이었다. 개항 전인 1872년 초량왜관에 올 때 일본은 기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872년엔 초량왜관을 일본 외무성이 접수하여 관리했다. 명치유신 전엔 둘 수 없었던 대포를 왜관에 두고 1874년에는 발포하여 부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일본은 초량왜관 거류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종종 군함을 파견하고 시위를 벌였다. 강화도 조약 한 달 전인 1876년 1월 15일엔 군함 6척이 부산항에 입항해 이미 도착해 있는 2척의 군함과 함께 대포를 쏘며 시위했다. 1월23일엔 초량왜관에 준비해 둔 야전포 2문과 탄약 7천발을 싣고 부산을 출발 강화도로 향했고 2월 26일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초량왜관 수문 앞 풍경



해관 : 관세 주권을 위하여


1876년부터 1883년까지는 관세가 없었다. 1878년 9월28일부터 두모진에 해관 설치하고 조선의 상인에게 세금을 거두자 일본이 관세징수는 규약 위반이라며 반발했다. 이에 조선은 관세가 아니라 내국인에 대한 징세라 버텼으나 일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3개월만인 12월 26일 수세 정지를 발표하게 된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국이 내정간섭을 하면서 청나라 이홍장은 조선에게 구미 여러나라와 통교를 권한다. 1883년 5월 영국과 독일 조약 맺었는데 그 조약에 수출입품 과세 조항이 삽입되어 일본만 과세에서 제외될 수 없게 되었다. 1883년 10월 3일 리홍장이 추천하는 로버트 하트 해관장이 취임하면서 해관이 개관했고 일본도 1884년 11월 24일부터 징세를 시작했다. 

 

해관이 초량왜관 내 지역인데 조선이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부산구조계조약에서 '옛 재판가를 제외하고 조선에서 만든 2동의 건물은 일본에서 만든 옛 개선소와 창고 6동과 교환하여 양국 관민이 사용할 수있도록'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관수가와 개시대청을 썼고 조선은 선창가와 개선소 창고 등을 쓸 수 있었다. 



선창으로 추정되는 돌담



관수가 : 일본의 식민정책은 거류민 정책


1931년 인도버마 총 인구는 3억35만명인데 반해 영국인은 겨우 15만6000명 거주했다. 총인구의 0.05%에도 못 미치는 수준인데 그중 6만명은 군인과 경찰관이었고 4000명은 공무원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경영 방식은 영국과 달랐다. 1931년 2,000만 조선인구에 일본인은 50만으로 총인구 대비 2.5%였다. 도시인구 비중으로 보면 일본과 영국의 식민정책의 차이는 확 드러난다. 1939년 경 일본인의 도시거주 인구 비중은 15.5%였고 부산은 222,690 중 51,802명으로 총 인구 대비 23.3%였다. 


1894년 2월 부산에 온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부산의 첫인상을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말한다. 당시 부산에 5,500명의 일본인이 살았고 일본 어부가 8천명에 달했다. 1914년 당시 처음 부제 실시 때는 부산의 일본 인구는 55,904 중 28,254명으로 더 많았다. 


개항 후 관수가는 일본관리관청사(1879년 9월 6일 준공), 1880년엔 부산영사관, 1905년 을사조약에 따라 부산이사청, 1914년엔 부산부청으로 바뀌게 된다. 부산부청은 관수가 자리에 1936년까지 존속했다. 부산부청 주변엔 경찰서(1880년 설치)와 거류민단 사무소 등 행정기관이 위치했다. 


부산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암매와 저당을 통해 서쪽으로는 대청, 보수동, 동쪽으로는 영주, 수정, 좌천, 범일 등으로 광범위하게 토지를 사들였다. 1905년 경 전관거류지 11만 평 외에 일본인들이 사들인 토지는 무려 5,381,714평이 되었다. 계속된 매축도 일본인 거주지의 확장을 도왔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전관거류지를 도심으로 하고 초량과 부산진을 부도심, 온천장을 교외로 한 부산시를 직조하게 된다.

 




대각사 : 식민의 도구 또는 개화의 창구


대각사는 원래 초량왜관 서관 중대청 자리다. 강화도 조약 후 초량왜관이 전관거류지가 되면서 1877년 동본원사 부산별원이 세워졌다. 해방 후엔 한국정부에 귀속되어 경매에 넘겨져 경남불교총무원이 되었다. 1969년 김경우 스님이 법당을 만들고 고려말에 만들어진 삼존불상을 모시면서 대각사를 창건했다.


동본원사 부산별원의 출발은 정치적 목적이 다분했다. 외무대신 오오쿠보가 히가시혼간지 관장에게 서한으로 조선포교를 종용하였고 1877년 9월 28일 오쿠무라 엔신이 조선포교 명을 받고 부산에 도착한 것이 동본원사 부산별원의 시작이다. 


동본원사의 설립은 성공적이었다. 그건 엔신의 적극적 포교활동 덕분이 아니라 스스로 일본 문명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조선의 승려와 개화사상가들 덕분이었다. 엔신은 포교일지에서 조선인이 하루에 적게는 2~3명 많게는 30명씩 왕래해서 무엇보다 기뻤다고 적고 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사람이 승려 이동인이다. 이동인은 1878년 6월 2일 동본원사를 처음 찾았고 1879년 엔신의 도움으로 일본에 도항을 해 10개월간 체류하면서 일본의 발전상을 살폈다. 그리고 일본 체류 중 일본에 수신사로 온 김홍집과 만나 신임을 얻는다. 귀국 후엔 김홍집의 천거로 민영익의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고종도 알현하게 된다. 이동인은 그후 국왕의 외교 참모관으로 활약하였고 1881년 3월 9일엔 신사유람단 참모관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신사유람단 출발직전 이동인은 실종된다. 배불숭유의 나라인 조선왕조에서 훈구대신의 반발을 사 암살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동인은 범어사 승려 또는 부산사람이었을 걸로 추측이 되는데 그가 죽었을 때 나이는 고작 서른이었다.  


서재필 박사 자서전에는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가 이동인이 구한 책을 봉원사 등 절에서 읽은 에피소드가 나온다. 당시엔 구하기 어렵고 사학으로 몰렸던 책들인데 개화파들은 이 책을 1년 이상 걸려 읽었다고 한다. 일본 책이지만 한자가 있어 이해에 어려움은 없었다. 자서전엔 이것이 개화파의 출발이자 근본이라고 적혀 있다. 이동인은 당시 개화파의 창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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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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