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 진보신당 전 대표를 만났습니다. 30년 만에 처음 직책이 없이 지낸다는 심상정 전 대표는 오히려 요즘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한 이날(8월26일)도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창원의 강연장으로 이동 중이었습니다. 직책도 내려둔 심상정 대표를 바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심상정 전 대표의 얘기를 따라가 보죠.


올해 진보신당 대표를 그만두셨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제가 30년 만에 처음으로 직책이 없는 상태예요. 노동운동할 때도 항상 자리가 있었는데 지금 아무 직책이 없어요. 이 시기를 잘 보내야 된다고 생각해요.

 

쉬시는 동안 뭘 하셨습니까.

 

지난 6월에 20일 간 북유럽 3개국을 돌아보고 왔어요. 핀란드에선 교육을 봤고 스웨덴은 노동과 복지, 노르웨이는 성평등에 관해서 돌아봤죠. 그중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모델로 평가받는 핀란드였어요. 우리의 극단적인 경쟁 교육 모델 이것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갔다왔죠. 경향신문 8월6일자에 핀란드 교육청장과 대담한 것이 실리기도 했어요. 요즘은 교육문제 관련해서 전국적으로 강연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예요. 7월부터 시작해서 지금 전국을 돌고 있는 중이예요.

 

핀란드의 교육은 어떤가요.

 

우리나라가 극단적 경쟁교육이라면 그곳은 극단적인 평등교육이예요. 대학까지 평등하게 가르쳐요. 개인의 개성과 잠재력을 많이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좋은 시민이 되는 것을 가르치죠. 공동체의 공익적 가치에 기여하고 더불어 잘사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시민을 가르칩니다. 거기는 등수라는 게 없죠.


심상정 전 의원은 어렸을 때 어떤 아이였습니까?

 

조신한 여자와 개구쟁이 둘로 나눈다면 어디에 속한 편입니까. 시골에서 막내로 컸어요. 개울에 가서 멱 감고 산나물 캐는 그런 시골소녀였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에 서울에 전학왔어요. 중학교까진 거의 말이 없이 지냈죠. 국회의원 되고 나서 동창들 첫마디가 “깜짝놀랬다”였어요. 전 학창시절에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사범대에 진학하셨더군요. 당시 대학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셨습니까.

 

대학 들어가서 내 꿈이 뭐냐면 연애를 해보는 거, 소설책 읽는 거, 여행 많이 다니는 거였어요. 교사가 되고 싶어 사범대를 갔는데 엄마가 절대 나서지 마라면서 토큰 두 개를 쥐어주고 그랬어요. 엄마가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운동권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운동권 되기 전에는 7cm 이하 하이힐을 신어본 적이 없어요. 긴 머리에다 스커트 입으며 멋도 내고 다녔죠.

 

학생운동은 어떻게 시작하신 겁니까.

 

그러다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연애 때문이었어요.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들을 고르다보면 하나같이 운동권이예요. 남자들을 사귈려니 운동권에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웃음) 그러나 운동권에 들여놓는 순간 깊숙이 빠져버려서 연애고 여행이고 다 날라가 버렸죠. 그런데 당시 운동권 남자들은 굉장히 관념적이었어요. 자기가 운동권이라는 이유로 여학생을 무시하고 그랬어요. 내 눈엔 그들이 진보적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비판도 했고요. 나는 사회의 전반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난 학생운동을 했거든요. 
 
운동권 내부에서 그런 생각을 피력하셨습니까.

 

그래서 남성위주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운동권을 거부하고 서울대에 여학생총학생회를 처음 만들었어요. 그리고 학회의 학생운동권 서클에 여학생 서클도 처음 만들었고요. 우리 사회에 기존 남성 위주의 학생운동권이 가지는 한계에 제가 정면으로 부딪혔죠. 위장취업도 서울대 여학생 중 첫 스타트였고 그 뒤로 후배 여학생들이 따라나왔어요. 85년 벌어진 구로동맹파업은 여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한 파업이었지요.

 

당시 구로공단의 노동환경은 어땠나요.

 

구로공단을 기준으로 하면 당시에 닭장집이라고 두어평 남짓되는 방 월세가 3만원이었어요. 일급 미싱사 월급이 잔업 특근까지 다해서 8-9만원 하던 시절이었죠. 13살 이상의 아이들을 공부 가르치고 일 시켜준다며 산업특례학생으로 데려다 일을 시켰죠. 그 아이들이 봉제공장에 시다로 일하면서 5만원도 못 받았어요. 자기 손에 들어가는 건 거의 만원도 안됐죠. 아침에 일하러 나와서 4시까지 일하고 학교 보내요. 그리고 8시쯤 다시 와서 잔업하고 특근해요. 그럼 그 다음날 아이들이 피곤하잖아요. 다림질 하면서 손 다 데이죠. 다림질할 때 프레스에서 손빼고 눌러야 되는데 졸다가 그냥 눌러서 손이 오징어처럼 눌려서 많이 다쳤어요. 한 달에 한건 이상은 사고가 있었죠.

 

대학생활과 너무 차이나는 여직공들의 생활을 보고 충격받으시진 않았습니까.

 

그때는 농활처럼 공활도 있었어요. 방학 때 공장을 경험해보는 거예요. 내가 공활을 갔다가 노동자의 참담한 삶을 보고 이 사람들이 인간적 대접을 받을 때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길로 3학년 때 학교 그만두고 노동운동을 시작한 거죠. 졸업은 운동권 복권시켜주던 때 수배중에 논문만 제출해서 받았죠. 수배중이라 졸업장은 못 받으러가고 우리 엄마가 가서 졸업장하고 교사자격증을 받아뒀죠. 어머니가 지금까지도 장롱 밑바닥에 그걸 모셔두고 있어요.

 

무려 10년 동안 수배생활을 하셨는데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구로동맹 파업 때 지상파 뉴스에 나온 적 있었어요. 파업 주도자로 현상수배 500만원 1계급 특진이 kbs9시 뉴스에 방송되었죠.

 

방송사 메인 뉴스에 수배 소식을 전한다는 게 좀 이해가 안되는데.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이었고 한국전 이후 노동문제가 일간지 1면에 보도된 첫 파업이었죠. 또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운동과 재야가 처음으로 연대한 파업이었어요. 구로동맹파업 노동자들을 변론하고 지원하면서 민변의 기초도 만들어졌어요. 새로운 시민운동 영역이 만들어진 시발점이 되었어요.

 

서거정국으로 진보정당은 오히려 축소된 느낌입니다. 서거 정국 이후의 계획이 있습니까. 친노신당이나 김대중 유훈 등으로 진보정당의 영역이 많이 침범당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역사는 거꾸로 가는 게 아니죠. 일부 정치 세력들이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에 기대서 정치하려는 흐름이 있지만 국민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봅니다. 한나라당과 진보신당을 다 합쳐도 지지율이 60%가 안되는 게 많거든요. 그만큼 기성정치에 대해서 불신과 혐오가 있다는 거죠. 두분의 후광으로 정치하는 건 지지받지 못하죠. 기성정치가 국민들과의 거리를 얼마나 좁힐 것인가, 그 대안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봐요. 진보신당은 관념에서 생활로, 국민들의 실제 삶에 밀착하는 생활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생활정치에 올인해서 이제는 산업화에서 민생의 시대로 새로운 시대를 안내하는 주체가 되어야죠.

 

내년 지방자치선거에 대비한 반MB 민주대연합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대연합도 생각해볼 수 있는 방안인데 만약 한다면 그 기준이나 방법은 어떠해야 된다고 보십니까.

 

MB에게 절대 권력을 넘겨주면 안된다는 게 국민들의 강력한 주문이죠. 그러나 국민들이 실제 주문하는 건 MB처럼 정치하지 말고 국민들에게 도움되는 정치를 해라는 겁니다. 과거처럼 민주당에 수혈하거나 상층차원의 연대만 가지고는 전환기 한국사회에서 큰 신뢰를 얻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삶을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방향에 대한 합의입니다. 그런 방향을 합의하고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방향이 아니고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정치세력들이 공존할 수 있는 선거연합이 되야 합니다. 그런 원칙에서 맞지 않으며 못하는거죠. 진보정치의 독자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진보정치의 확대발전을 위한 계기로서 의미를 가질 때 해야합니다. 

 

가족분들이 해주는 조언이나 지적이 있습니까.

 

아들은 "엄마 운동해야돼"고 남편은 "공부해야해"예요. 정치인은 민심과 통할 수 있는 확고한 철학과 소신이 있어야죠. 학문하라는 뜻이 아니라 민심을 잘 읽고 시대적 가치와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두 남자가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기대는 상당히 포기했어요. 가족이 같이 영화는 자주 보려고 해요. 얼마전 해운대 보러갔다가 표가 없어서 못 봤어요. 다음에 꼭 볼 생각이예요. 아들한테는 매주 일요일 찌개 끓어주는 것도 있어요.


 

Posted by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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