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춘은 상도동 출신 정치인이다. 민추협 의장 시절 비서로 시작해 야당 총재 비서를 거쳐 청와대 정무비서까지 김영삼을 보좌했다. 94년 2년 간의 청와대 생활을 끝내고 김영춘은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첫번째 선거에는 실패하고 2000년 두번째는 매주 선거구 8개 동의 재활용폐지를 상차시키는 등 밑바닥 표를 훓는 활동 끝에 광진구갑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김영춘은 상도동 막내로 통했다. 김영삼의 둘째 아들 김현철에 이은 셋째아들로 불릴 정도로 김영삼의 신망이 두터워 참모들이 김영삼에게 껄끄러운 말을 해야할 때면 김영춘을 통하기도 했다. 김영삼의 최측근 김덕룡과는 해수욕장도 같이 갈 정도로 친분을 과시했다. 신한국당 시절 김영춘은 제 1당의 최대 정치 계파에서 가장 촉망받는 정치신인이었다.

 

그런데 김영춘은 이런 주변의 기대와는 결이 다소 다른 정치활동을 했다. 87년 항쟁 후 단일화 무대에서 김영춘은 상도동 비서로서 동교동 비서와 몰래 단일화를 논의하기도 했고 후배들에게 당사 농성을 부추기며 민주당 압박을 주문하기도 했다. 김영춘은 신한국당 내에서 자신이 어떤 계파로 분류되는 걸 싫어했고 그만큼 정치활동도 독립적이었다. 김영춘의 이런 모습은 운동권 출신에서 기인한다. 말하자면 김영춘은 본적이 운동권이었다.

 

김영춘은 상도동에선 막내지만 386운동권에선 선배다. 80년대의 첫 해인 81년 고려대 문과대에 입학해 84년엔 서울대, 연세대와 함께 총학생회 부활을 주도해 고려대 총학생회장이 되었다. 84년 전체 총학생회 투쟁위원장을 맡았던 김영춘은 학생운동사 한페이지를 장식하는 84년 11월 민정당사 농성사건 주동자로 구속된다. 이 사건은 85년의 2.12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런 김영춘도 당시 운동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교조주의에 실망을 하고 결국 나오게 된다. 석방 후 노동운동에 투신한 김영춘은 내부에서 사적유물론의 수정을 제안했다가 수정주의자 비슷하게 낙인이 찍혀버렸다. 이에 대한 토론을 요구하다 거부당한 김영춘은 결국 탈퇴를 선언하고 직선제 개헌운동으로 방향을 돌려 상도동에 합류하게 된다.

 

운동권에서 상도동 합류는 맑시즘을 논하던 공간에서 현실정치의 묘수를 짜내는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으로 김영춘에게는 큰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김영춘의 정치이력에 이러한 전환점은 한번 더 있다. 2003년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으로 나서면서 김영춘은 보수 정당에서 진보적 정당으로 두번째 정치적 전환을 감행했다.   

 

이런 김영춘을 두고 철새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그간 선거 결과들을 보더라도 그 비판들이 김영춘에게 걸림돌로 작용한 것 같진 않다. 그건 김영춘의 전환에 정치적 맥락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변화가 차곡히 쌓여 임계점을 지나 반전이 일어나는 변곡선처럼 대중들은 김영춘의 전환이 정치환경의 변화와 김영춘 개인의 고민이 충분히 쌓여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운동권 내 교조주의에 대한 실망과 직선제개헌투쟁의 일점돌파를 통한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희망이 운동권에서 상도동으로의 첫번째 변곡점을 만들었고 김영삼 퇴임 후 장마당 건달 같은 수구들의 발호로 도로 민정당이 되버린 한나라당에 대한 절망과 양대 정당의 지역주의에서 탈피해 창당된 열린우리당에 대한 희망이 두번째 변곡점을 만들었다. 

 

정치적 행보를 볼 때 김영춘은 이익 민감형보다는 호기심형에 가깝다.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으면 물어 따져야 하고 생각이 정리가 되면 감행해야 하는 스타일이다. 일본을 알고싶다며 방송대 일본어과에 입학하고 18대 총선 불출마 선언 직후엔 자전거로 전국 2,050km를 29일 간 달렸다. 2011년에는 깨알같은 글자로  채워진 400페이지가 넘는 정치인 책 같지 않은 책을 내기 위해 1년 간 양평 산골에 주말마다 들어가 글을 썼다.

 

김영춘은 글쓰기를 좋아한다. 고등학교 3년 간 문학동아리 활동을 낙으로 삼으며 지냈다. 올해 르몽드 디플로마끄 5월호에 실은 김영춘의 386 자아비판 글은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학도 원래는 국문과를 가려했는데 밥벌이가 힘들다는 부모님의 설득에 한 달 간 버티다 타협한 것이 영문과였다. 그의 문학적 감수성은 임계점에 이른 변곡선을 참지 못하게 했고 호기심과 열정이 이끄는 방향으로 그를 나아가게 만든 것 같다. 김영춘은 정치에 문학적 서사를 불어넣는 것 같다.

 

2012년 김영춘은 또 한번의 변곡점을 만들었다. 당을 바꾸고도 두번이나 당선된 서울 광진갑을 포기하고 부산 출마를 선언한 것이다. 광진구는 야권에 대한 여론도 좋은 곳으로 지난 총선 야권 후보가 여유있게 당선된 곳이다. 반면 부산은 김영춘에게 사지나 다름없었다.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김영춘은 막판까지 피를 말리는 승부를 펼친 끝에 석패했다. 그러나 김영춘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 지역활동을 이어갔고 올해 초엔 부산시장 도전을 선언했다.

 

사실 부산시장은 4년 전 민주당 쪽에서 권유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김영춘은 몇 달만에 부산시를 책임지겠다는 건 부산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사양했다. 서사가 없는 도전은 김영춘에겐 참을 수 없는 도전의 가벼움이었다. 지난 총선 가족들이 모두 부산에 정착한 것도 부산 도전에서 불완전한 서사를 쓰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사의 토대를 갖춘 김영춘은 지금 부산시장 도전의 치열한 스토리들을 하나씩 채워가고 있다. 부산희망찾기 100일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6월 18일 부산항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부산 각지 50여개소를 탐방하여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생각을 남기고 있다. 

 

 

그때 총재는 왜 그랬습니까, 그랬더니 “야, 그때는 50년 전이었고, 이승만이가 하도 그래서 그랬잖아.” 그래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도로 민정당이 되어버렸는데 내가 도로 민정당에서 어떻게 정치를 합니까?” 했더니 “떨어진다니까!” 해서 “총재님도 떨어졌잖아요.” 그러면서 갑론을박을 하다가 제가 마지막 결론을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정말 자부심을 크게 가지고 있는 것이 그렇게 젊은 정치를 했던 청년 YS정신, 염산테러를 당하면서도 박정희한테 굴복하지 않았던 그 김영삼의 정신,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야당 총재를 제명시키던 정권과의 그 험한 싸움을 감당했던 70년대 말의 그 김영삼 총재의 정신, 이게 내가 자부심으로 갖고 있는, 내가 김영삼 대통령의 비서였다는 자부심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청년 YS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딴지일보 인터뷰 중에서)

 

 

김영춘은 한나라당을 떠나기 전 김영삼을 만난 자리에서 YS제자임을 자부한다고 했다. 김영춘은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3당 합당이 문제점도 많지만 군부를 제거하여 민정으로의 원활한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등의 순기능도 있다고 말했다. 김영춘은 역시나 숨길 수 없는 상도동 사람이다. 이런 김영춘이 부산시장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김영춘의 부산시장 당선을 민주계의 부산 복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김영삼 퇴임 후 도로 민정당이 되어가는 새누리당에서 개혁적인 성향의 민주계는 급격히 쇠퇴해갔다. 2003년 김영춘을 포함한 5인이 탈당했고 급기야 지난 대선에선 김덕룡과 김영삼 아들 김현철씨가 민주세력이 이겨야 한다며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엔 김영춘의 역할이 컸다는 얘기가 들린다. 어쨌든 김영춘이 부산에 돌아오자 부산 민주계가 들썩이고 본인은 부산시장 후보로까지 나서고 있다.

 

김영춘이 부산시장이 되면 그 여파는 지역선거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부산시장 선거가 3당 합당 이후 가장 큰 정개개편의 진앙지가 될 것이다. 3당 합당 후 당내 투쟁을 벌이던 김영삼 진영에 합류할 때 김영춘은 김영삼이 당선되긴 어렵다 보고 결자해지 차원에서 들어갔다고 했다. 상도동 막내인 김영춘이 민주당 후보로 당선된다면 바로 그 결자해지가 20년만에 이루어지는 셈이다.

 

김영춘이 한때 부산 정치의 자랑스런 계보였던 부산 민주계를 부산에 다시 세우고 있다. 김영춘이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상도동 막내 김영춘의 부산 등장은 이런 흐름을 만들고 있다. 김영춘이 부산 정치의 서사를 쓰고 있다. 그 서사는 한국 정치의 큰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임계점에 다다른 한국 정치의 변곡선 어딘가 있는지 모르겠다. 

 

 

 

Posted by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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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승원 2014.05.02 0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영춘 의원.
    나 사회학 81 박승원이야.
    오랫만이네.
    건승을 멀리서나마 기원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