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직을 책임지기엔 조금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기있는 얼굴에선 조직의 책임자 같은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커서님보다는 한참 어리지만 생각보다 나이가 좀 많습니다. 올해 55세입니다.


나이는 쉽게 속일 수 없다. 얼굴에 쌓이고 행동거지에 배인 세월의 굴곡은 숨기기 어렵다. 실제 나이를 알고나면 나이를 알려주는 신체의 정보들은 더 잘 드러난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는 나이를 알았음에도 신체 어디에서도 50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여자의 눈이 생글거렸다. 


"지난 200년 동안 인간의 노화가 좀 지연되었죠. 지금은 60대까지는 젊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영의 나이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자 이제 부활에 대한 의문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논리코드는 대체 뭐지? 왜 256개일까? 자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름없이 뻗은 바지 위에 약간 헐렁한 셔츠가 흘러 한뼘 정도 겹쳤다. 앞으로 나왔다. 허벅지가 바지 속에서 탄력있는 선을 그렸다. 가까이 다가온 자영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질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느껴졌다. 


"22세기 경 학자들은 인간의 판단논리가 8개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 8개는 맞음·틀림, 유무(有無), 승부, 인지, 찬반, 선호, 다소(多少), 쉬움·어려움입니다. 이 8개의 기본 판단을 조합하면 256개의 코드가 나옵니다. 어떤 고도의 논리도 256개 논리코드의 조합으로 가능합니다. 인간의 정신도 바로 이 논리코드의 조합입니다."


논리코드만으로 인간의 영혼이 만들어진다고? 그렇다면 기억은?


"물론 논리코드만으로 인간을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정신에 채워질 기억이 필요하죠. 커서님에 관한 기록과 커서님과 지인들이 남긴 기록 등이 기억의 재료입니다. 기억 데이타를 주면 정신유전자(SDNA)는 기억을 재구성합니다. 잘못된 데이타는 걸러내고요. 이런 식으로 데이타가 쌓이면 쌓일 수록 기억은 정교해집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정교해진 걸까? 100년 동안 내 안에 쌓인 기억들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 관한 기록들 몇개를 짜집기 해놓곤 그게 나라고 얘기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어졌다면 못 만들게 뭐가 있을까? 아무 정신유전자에다 기억을 던져주면 뚝딱 사람을 만들 수 있다. 이걸 과연 존재라고 할수 있을까? 자영이 소파에 앉았다. 흘러내렸던 셔츠단이 다시 바지춤에서 주름을 잡았다. 얼굴의 웃음기는 얕아졌다.


"정신유전자와 기억은 호응합니다. 만약 커서님의 기억이 아니라면 정신유전자는 주입된 기억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주 깔끔하고 예민한 영혼인데 산만하고 둔감한 사람의 기억이 주입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럴 때 정신유전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정신유전자가 잘못된 기억에 호응할 확률은 지문의 오차보다 1억배 낮습니다. 


그렇다면 기억은 별게 아니다. 정신유전자가 기억을 구분한다는 것은 인간이 행할 사고와 행동이 이미 정신유전자에 정해졌다는 얘기다. 기억은 정신유전자의 좌표일 뿐이다.


"만약 기억이 영혼이라면 커서님은 매일 달라져야 합니다. 기억이 매일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커서님의 정신유전자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일합니다. 그렇다면 커서님의 영혼은 무엇입니까? 기억입니까? 정신유전자입니까? 정신유전자라는 구조에 기억이라는 재료가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 바로 커서님의 영혼입니다. 영혼은 기억이 아닙니다." 


영혼이 기억이 아니라면 영혼은 코드다. 인간의 육체가 DNA라는 코드인 것처럼 영혼도 SDNA 코드다. 따라서 DNA와 SDNA를 알면 인간을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이 코드라는 게 불쾌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오랜동안 염원하던 영생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코드를 알면 인간은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너희는 코드니 구원받으리라' 영생이 신의 영역이 아니라 기술자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커서님 이제 쉬셔야 합니다. 저장장치 내에서 의식을 너무 오래 작동시키면 바이러스가 쌓이게 됩니다. 코드를 망칠 수 있습니다. 곧 육체에 전송시켜 드겠습니다. 그전까진 강제적으로 의식의 활동을 조절해야 합니다. 이제 커서님 의식의 스위치를 닫겠습니다."


이대로 전원이 꺼진다면 그건 죽음인가 수면인가? 나는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그건 이들의 판단에 달렸다. 필요 여부에 따라 나는 존재할 수도 안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들은 몇 세기 뒤에 나를 깨울지도 모른다. 핑계야 만들면 그뿐이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코드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일 수도 있다. 현재로선 저장장치 안에서 의식만 존재할 뿐이다. 감각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지금 이것이 나라는 자각만 있을 뿐이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자영의 이 말을 듣고 1초 쯤 뒤 내 의식은 사라졌다. 물론 이건 나중에 의식이 깨어나서 안 사실이다.





Posted by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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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성의 전당 2018.10.13 2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영혼이라는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