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을 상실한 인간은 청각·촉각·후각에 의존하게 된다. 시각을 배제하고 세상을 인지하게 되면서 눈먼자들은 이러한 감각들의 세계를 깨우치게 된다. 

눈먼자들은 안대노인이 들려준 라디오의 음악소리에 행복한 표정으로 귀기울이고 서로를 인지하기 위해 생살을 만지고 체취를 맡는다. 시각이 사라진 자리에 소리와 온기와 향기가 채워지면서 인간의 만남은 더 단단하고 깊어진다.

시각은 청각·촉각·후각을 통한 만남을 방해한다. 보고나면 듣고 만지고 맡으려 하지 않는다. 시각은 상대를 보다 깊이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각만의 인지는 인간들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유대를 어렵게 한다. 시각은 같음보다 다름에 주목하여 인간 사이의 띄워놓는다. 여기에서 차별이 생긴다. 

시각이 사라지자 차별도 사라지면서 흑백 구분없이 사랑에 빠지는 일이 생겨난다. 70대 흑인노인이 젊고 아름다운 백인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여자는 노인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되묻기까지 한다. 인종뿐 아니라 나이까지 차별이 없다.

시각이 없어져서 가능한 일이다. 상대를 판단하는데 시각요소가 사라져버리자 눈먼자들은 청각·촉각·후각으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인지를 재구성한다. 편안한 목소리와 좋은 촉감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프리허그는 시각만의 만남에만 의존하는 인간에게 촉각과 후각의 만남을 갖게 해준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서로 껴안는 이 만남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섹스의 가장 큰 쾌감은 사정이 아니다. 그건 마무리다. 섹스의 목적은 상대의 맨살을 만지고 껴안아보는 것이다. 껴안는 게 가장 큰 쾌감이라면 동성애를 이해못할 것도 없다.  

눈먼자들은 시각으로부터의 해방도 맛본다. 시각의 구속이 사라진 세상에서 눈먼자들은 벌거벗은 채 공동체 생활을 하고 아무 꺼리낌 없이 길거리를 활보한다. 

시각은 경계심이 가득하다. 연인도 마주보는 게 편하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가 상대의 눈을 볼 땐 적대감이나 구애 둘 중 하나인데 둘다 상처받기 쉬운 행동이다. 

인간에게 텔레파시가 있었는데 그 능력을 갑자기 모두 상실했다 가정하면 영화의 이해에 도움이 될까? 상대의 생각을 읽는 인지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해 패닉에 빠질 것이다.

시각에 주로 의존해 사물을 판단하던 인간에게 빛의 인지능력을 없애버리면 활동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처럼 텔레파시의 인간들은 상대의 마음을 읽지못하는 것에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저들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판단할 수 있냐며 경악할지 모른다.

텔레파시 인간들은 텔레파시 때문에 청각과 촉각 뿐 아니라 시각까지 등한시 했을 것이다. 텔레파시가 사라진 후 인간들은 이제 이 감각들을 동원해 서로를 인지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서 시각·청각·촉각·후각의 세계를 깨우치게 될 것이다.

텔레파시에 대비해온 인간은 텔레파시 때문에 긴장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남들이 자신의 생각을 읽고 흠잡지나 않을까 머리 속을 항상 정리하고 가꾸었을 것이다. 텔레파시가 사라지면 인간은 거추장스런 생각의 가식을 벗어던지고 텔레파시의 인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것이다. 

최초로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눈뜬자의 독백이 실리면서 영화는 끝난다. 눈뜬자는 눈먼자들이 시각의 상실을 통해 배웠던 그 시간 동안 자신은 무엇을 깨우쳤나 자문한다. 남들이 인지하지 못한 걸 인지하는 자의 고통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눈먼자들은 시각의 상실을 통해 청각·촉각·후각의 세계를 깨우치고 질병과 차별의 의미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걸 다 지켜본 단 한명 눈뜬자는 눈먼자들을 돌보면서 눈먼자들이 보지 못한 세상의 온갖 추악한 것들을 다 보았다. 눈뜬자는 육체적 정신적 파괴만을 겪었다.

시스템을 관리 일을 하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이 일 하면서 인간이 정말 싫어졌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온라인상의 사람들의 행동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눈먼자들의 세계에 눈뜬자였다. 친구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의 추악한 인간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난 후 원작인 소설이 읽고싶어졌다. 2시간짜리 영화에 담아내기엔 원작의 '눈먼자들이 세계를 재구성한다'는 아이디어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통찰을 건드리기에 급급했던 영화보다 그 통찰을 구성하는 언어들이 담겨있는 소설이 읽고싶어졌다.

원작을 읽었더라면 조금 더 영화 자체에 몰두할 수 있었겠지만 원작을 잃지못한 나로선 원작을 전하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영화에서 원작의 지적자극을 주워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따라서 내가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를 보고 쓰는 것은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읽은 소설 눈먼자들의 도시에 관한 감상문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눈먼자들의 도시'처럼 바뀐 조건과 환경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추적하는 작품들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탐구한다. 눈먼자들이 세계의 질서를 재구성하고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인지하는 과정을 보면서 관객(독자)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적자극을 얻게 된다.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 지적자극은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영화이다. 그게 소설의 힘이긴 하지만.
Posted by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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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이너스 2008.11.26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 요새 무슨 영화볼까 고민중였는데
    이런것도 괜찮은걸요?
    덕분에 좋은 힌트 얻고갑니다.^^

  2. 바다리 2008.11.26 1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역시 볼 만한 것 없나 하던 차였습니다. 극장으로 나서야 겠군요.

  3. 낭만시인 2008.11.26 15: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스템관리를 하신다는 친구분의 사례가 와닿습니다.
    영화 한편 보고 나서, 주변인이나 주변상황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 좋은 경험 같습니다.
    영화는 영상 자체로도 오래 남을 수 있지만, 그 영상이 실생활에 투영될 때 진정 내것이 되고, 그 독특한 감상이 재산이 되는 것 아닐까요?
    한편의 영화와 생활이 만나 온전한 감상을 이루는 일은 사소한 것 같지만, 그런 영화를 만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좋은 감상평 잘 보고 갑니다. 저도 이 영화가 더 보고 싶어지네요.

  4. 2008.11.26 15: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5. 카제쿠마 2008.11.26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작에서는 젊은 여인이 노인에게 고백했던 거 같은데....
    약간 틀린가보군요.

    원작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써 굉장히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커서 2008.11.28 1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랬군요. 그러니 노인이 자신있게 같이 있고싶다 했군요. 카제쿠마님 얘길 들으니 영화속 장면이 이해가 더 되는 군요.

  6. 요즘 2008.12.01 0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작과 영화를 모두 본 저는 영화에 솔직히 실망감이 컸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인지 볼만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분위기에서 구지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선택하는 게 과연 좋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네요. 오감에 대한 자극 뿐 아니라 지적 자극에도 충실한 영화들이 속속 개봉중이라 시간을 어떻게 쪼개 영화관으로 갈 지가 고민이 되는 시기입니다.